정말로, 모두가 평온했으면 좋겠다.





 "어디 떠나시나 봐요?"
 "아뇨. 생활이 엉망이라……."

 다이어리, 반짇고리, 집게, 연습장, 그리고 자명종 시계. 몇만 원이 순식간에 지출되었다. 나는 궁색한 답변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. 점원은 초라한 내 행색을 훑어보며 빙그레 웃는다. 평소 같았으면 기분 나빴을지도 모른다. 도리어 점원의 미소는 나에게 힘내라고 응원하는 듯했다. 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노란 은행잎이 잔뜩 깔렸었다. 어제부터 내린 비가 은행잎을 다 떨궈 놓았다. 어제는, 그리고 어젯밤에는 정말로 비가 내렸다.

 길을 걸으며 평생 잊기 어려울 어젯밤을 회상한다. 나는 그 자리에서 술병에 머리가 깨지리라 생각했었다. 하지만, 선생님은 아주 당연한 말씀을 조곤조곤하셨고, 아주 당연하기에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것들이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. 나는 이를 악물었다. 술을 들이켰고, 속을 뒤집을 듯 토해내고, 다시 술을 들이켰다. 

 아침은 사우나에서 맞았고, 내 머리는 깨어질 듯 아팠다. 대충 씻고 식사를 마치자 핸드폰이 울렸다. 댓 걸음에 챙겨입고 밖으로 나섰다.

 잔인하게 보냈던 가을의 끝자락에서 따뜻한 겨울을 맞는다. 어리석었다. 무척 어리석었다. 그렇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. 하지만, 급하게 일어서지는 않으리라. 좀 더 조용히, 천천히, 따뜻하게 일어설 생각이다.


 말갛게 떠오른 마음이 나를 감싼다. 그 마음을 빌어, 예전까지는 전혀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한다. 정말로, 모두가 평온했으면 좋겠다.

by 鎭眞 | 2009/11/01 18:19 | 트랙백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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